[한겨례]“보건의료 최우선 과제는 ‘환자의 생명’이 돼야” [건강한겨레]

한국백혈병환우회 0 763 2024.12.05 10:01

“보건의료 최우선 과제는 ‘환자의 생명’이 돼야” [건강한겨레]


“어느 상황에서건 환자의 생명이 최우선이 돼야 합니다.”


국내 환자단체 활동의 산 역사인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이하 환자단체연합) 대표가 늘 강조하는 말이다.


그는 2001년 아내가 만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 환자 보호자로서 ‘글리벡의 신속한 접근권 운동’에 참여하면서 환자 권익 보호 활동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한국백혈병환우회에서 봉사자, 상근자, 사무국장, 대표로 활동하다 2010년 2월에는 다섯 개의 환자단체와 함께 한국환자단체연합회를 창립했다. “대한민국에 환자 중심의 보건의료 환경을 만들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최근 환자 중심 의료가 부상하고 있지만, 15년 전만 해도 ‘환자 중심’은 보건의료인 중심으로 돌아가던 보건의료계에서 낯선 개념이었다.


늘 정장에 백팩을 메고 다니는 안 대표는 보건의료계 주요 사안이 있는 곳을 부지런히 누비고 다닌다. 국회나 여러 단체에서 열리는 토론회를 비롯해 정책 관련 심포지엄 등 여러 행사에서 환자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환자단체연합은 지난 11월18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함께 국민 중심 의료개혁 연대회의 출범을 선언하기도 했다.


안 대표는 최근 의정갈등은 한국 환자들이 놓인 ‘취약한 현실’을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생명과 직결된 의료 문제가 정부나 집단의 이익으로 인해 근간부터 뒤흔들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보건의료 생태계의 핵심인 환자의 지위나 권익이 여전히 탄탄하지 못하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사태로 많은 중증질환자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목숨을 잃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안 대표는 “집계를 제대로 할 수 없어서 그렇지, 지금 의정갈등 탓에 죽어가는 환자가 엄청나게 많을 것으로 본다. 특히 더 이상 치료법이나 치료제가 없는 말기 암환자들의 경우에는 절망적이다. ‘서울 빅5 병원’이라고 불리는 대형병원들이 우리나라 전체 임상시험의 절반 이상을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전공의 집단사직으로 지난 9개월간 신규 환자를 거의 받지 않고 있다. 말기 암환자들에게 임상시험은 유일한 희망이다. 임상시험에 참여해 생명을 살리거나 연장하는 사례들을 의료현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사태로 희망 자체가 아예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런 일이 다시 재발하지 않아야 한다.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 환자가 위협받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강력한 법안을 만들어야 하는데 국회가 적극적이지 않아서 안타깝다. 이번 국회에서는 꼭 법안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2020년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필수의료 공백 방지 내용을 담은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의료계의 반대로 폐기됐다. 개정안은 ‘의료법에 필수유지 의료행위를 규정하고 동 행위에 대해서는 정당한 사유 없이 정지·폐지 또는 방해하는 행위를 할 수 없도록 하며 위반 시 제재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환자단체를 기존 시민단체나 소비자단체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안 대표는 “환자운동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며 “환자의 투병 및 권익 증진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지향한다”고 짚었다.


이런 특징을 기반으로 환자단체는 환자안전법 제정을 비롯한 여러 성과를 이뤄왔다. 환자안전법은 의료기관에서 환자가 치료받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환자안전사고를 예방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제정된 법률이다. 의료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환자안전사고(오진, 약물 오류, 수술실 사고 등)를 예방하기 위해 의료기관과 환자와 정부가 협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2015년 1월 제정되고 2016년 7월부터 시행됐다. 환자단체의 지속적인 목소리가 법 제정에 중요한 촉매제가 됐다.


이 밖에도 고가 신약과 치료제의 급여화를 통해 희귀질환 및 중증질환 환자들이 경제적 부담 없이 신약과 치료제를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환자들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해왔다. 환자단체연합은 2020년 10월6일에는 제1회 ‘환자의 날’을 제정하면서, 환자 권익 보호와 인식 개선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도 나섰다.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배경으로 안 대표는 환자단체연합과 소속 여러 단체의 꾸준한 모임을 꼽았다. 주 1회 여는 정기회의에서 꾸준히 환자 관련 중요한 보건의료 정책이나 제도, 입법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역량을 키워온 것이 전문성을 키우는 데 보탬이 됐다는 설명이다. 안 대표는 “신규 환자단체도 1~2년 정기회의에 참여하면 굵직한 보건의료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된다. 이런 의제 설정 능력과 전문성이 환자단체를 차별화하는 힘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환자단체가 직면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 산하 약 60개의 법정위원회 중 환자단체가 참여한 곳은 고작 10개 정도다. 나머지 대부분은 시민단체나 소비자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환자단체의 영향력이 아직은 충분히 키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정 문제도 넘어야 할 산이다. 안 대표는 “독립성을 유지하려다보니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국외에서는 제약사나 정부의 지원을 당연시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지원을 받을 경우 단체의 진정성이 의심받고 영향력이 감소할 우려가 크다”고 토로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환자 중심의 보건의료 환경 구축이라는 의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고 안 대표는 강조했다.


환자단체연합은 앞으로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로 ‘환자기본법’ 제정을 꼽았다. 안 대표는 “현행 법률에서는 환자가 의료체계의 주체로 대우받지 못하는 현실이 크다. 환자기본법이 제정되면 환자 권리를 보호하고, 환자 중심의 보건의료 환경을 구축하는 데 큰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환자기본법’은 환자와 환자단체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하고, 환자 권리와 의무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요 권리로는 △보건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 △정보 접근 및 자기결정권 △비밀보호와 안전한 치료를 받을 권리 △상담 및 분쟁 해결 신청권 △사회복귀 지원 권리 △정책 결정 참여권 등이 포함된다. 안 대표는 “국가 차원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환자 투병 및 권익 증진 정책 추진을 위해 △환자단체 정의를 규정해 법정위원회에 환자를 대변해 참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실태조사와 연구사업을 통해 환자정책 기본계획·시행계획을 수립하고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환자정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환자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 이를 통해 환자가 투병 및 권익 증진에서 객체나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환자 중심의 보건의료 환경을 구축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기사출처 : 한겨례 윤은숙 기자 (https://www.hani.co.kr/arti/hanihealth/medical/1171001.html)

Comments